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앵그리 인치

오덕후/글연성

by pak. 2021. 8. 25. 17:26

본문

선생님. 그 강에는 물 대신 피가 흘렀습니다.
스스로 깨달은 순간 그 근처에 가는 족족 토기가 치밀었던 이유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

그 옛날 고서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라노스의 성기를 잘라 바다에 던지니 아름다운 사랑의 여신이 태어났지요. 내심 소년 시절에는 기대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걸 떼어내면 나에게도 무언가 찾아오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신은 아니라도 하다못해 설탕 요정이든, 키우고 싶다고 아버지께 졸라대던 조그마한 강아지든 말입니다. 그런데 왜 제 환부에서는 비린내나는 혈액밖에 비어져나오질 않는지요. 소년인 저는 나무로 된 좁은 욕조 안에 다리를 구긴 채 앉아 있습니다. 쇠고기 육수처럼 허여멀건 아편물 위로 찻잎을 우려내듯 시뻘건 피가 퐁퐁 솟아오르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아편 향기에 잔뜩 취해 하얀 수면에 비친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반쯤 감은 눈, 푹 젖어 둥근 이마에 눌어붙은 머리카락, 퉁퉁 부은 입술…. 그때만큼 제가 볼품없게 느껴진 적도 없었습니다. 곧 뱅글뱅글 돌며 퍼지는 혈흔이 우울한 표정을 가렸습니다. 어지러운 것도 가시고 뜨뜻한 목욕물 속으로 가라앉아 갑니다. 우유보다 포근하고 술보다 달콤한 잠의 신이 작은 소년의 나신을 감싸 왔습니다.

사실 잘라내기 전에도 제 몸에 그리 만족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발가벗고 거울을 가만 쳐다보자면 있어선 안될 것이 있는 듯한 이물감에 슬쩍 수건을 가지고 그곳을 가리고는 했지요. 학교에 간 후로는 일부러 계집아이들 사이에 끼어 놀고 그애들이 저를 마음에 들어했으면 해서 어머니의 루주나 패티코트를 훔치기도 했습니다. 발각되어 종아리가 벌개지도록 맞은 뒤로는 그러지 않았지만요. 어쨌든 저는 그 무리에 꽤 오랫동안, 또 잘 끼어 있었습니다. 저 자신도 그들도 나를 꽤 마음에 들어했고요.

요지는 방법과 시기, 그리고 목적이 잘못되었다뿐이지 저는 한평생 마음속으로 그 불필요한 살덩이를 떼어내고 싶어했다는 겁니다. 제가 원할 때, 원하는 방법으로 똑 하고 떼 버렸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후련했을까요! 하지만 제 고환을 도려낸 것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형이었고 또 교회이면서 왕이였습니다. 우습지 않습니까? 그깟 못생긴 고깃덩이가 뭐라고 그 많은 사람이 매달리다니요!

제가 거세한 이유는 경박하고 하찮았습니다. 맑은 목소리를 유지해서 노래를 부르게 시키려고 들었던 겁니다. 소년 시절에는 합창단에 속해 있어서, 존경하는 국왕 앞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것이야말로 찬가였습니다. 가사의 뜻도 알지 못하고, 심지어 상대가 기뻐할지 어떨지도 알지 못하는데 그 수많은 소년들이 한목소리로 꾀꼬리 새끼처럼 삑삑 울어 댔어요. 재미있는 콧수염을 단 남자가 오르간을 연주하며 뿌듯한 표정을 짓고요. 그런 식으로 집안을 지탱할 정도의 돈을 벌 수 있었던 겁니다. 초반에는 저도 꽤 두드러진 학생이었으니까요. 물론 시간이 오래 지나면 나처럼 남성을 잃은 소년 중 독을 품은 몇몇이 깃털이며 가발을 쓰고 나타나 도르래 그네를 흔들며 천사의 목으로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저도 별 수가 없는 겁니다. 키가 조금 크고 이목구비 생김새가 남들보다 고왔습니다만 단지 그뿐이었으니까요. 거기서 뛰쳐나온지는 좀 됐습니다. 집에서 나온지는 더 오래됐고요.

뒤돌아보면 나는 이미 반골의 길을 걷고 있었죠.

•••

오랜만에 편지를 보냅니다만 초장부터 역겨운 이야기만 잔뜩 해댔군요. 선생께서 제 아랫도리 사정에 대해 궁금한 티를 내시기에 구구절절 써 보았습니다. 먼저 실례한 것은 댁이니 잘못했다는 생각은 갖지 않습니다. 더 드릴 얘긴 없군요.

이 이후로는 선생님이 아시는 그대로입니다. 대학에 들어가 학식을 쌓고 똑똑한 사람들을 만나고, 우물에서 탈출한 후로 의기양양하게 돌아와 보니 고향은 구정물이 흘러넘치는 쓰레기장이나 다름없는 곳이었죠. 보이지 않던 것을 보기 시작하면 그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법입니다. 도시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마차에 실은 진귀한 도자기가 깨졌다는 이유로 허리께를 발로 채여 높디높은 아치형 다리에서 떨어지는 마부를 보았습니다. 더 이상 살 길이 없어 빚만 남기고 그 밑으로 곤두박질치는 부모들도 보았습니다. 선생님. 그 강에는 물 대신 피가 흘렀습니다. 선지처럼 진득하게 엉긴 피가 용암보다 느리게 수로 위를 흘러갑니다. 그런 사실을 깨닫고 나면 전처럼 잿빛 강가에서 노래를 부를 수조차 없습니다. 스스로 깨달은 순간 그 근처에 가는 족족 토기가 치밀었던 이유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곳이 나의 바다였다는 것을요. 내 피투성이 고환을 빠트린 곳이 여기였다는 것을요. 이 끈덕지고 냄새 나는 하수도에서 비너스는 태어나지 않을뿐더러, 돌아오지 않는 것은 내 남성뿐만이 아니라 내가 살아오고, 사랑했던 그 모든 것이었다는 것을요. 내 높은 목소리는 노래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아편에 취해 잠든 나의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요.

저들이 앗아가는 것이 내 보잘것없는 성기가 다겠습니까? 팔다리를 자르면 목울대가 시뻘게지도록 소리를 지르고 목마저 자르면 혼백으로라도 남아 영원히 왕궁을 저주할 겁니다. 나는 잃을 것이 없습니다, 선생님. 이건 초석에 불과합니다. 조만간 큰일이 일어날 겁니다. 그러니 대비해 두세요. 당신은 세상에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아는 인간이니까요.


잃지 않는 긍지로 숨이 멎을 때까지,
시모 로마노.



추신: 이사장 된 것 축하드립니다.



우리는 죽어도 사는 사람들

시인의 꿈과 전사의 심장을 가진 사람들

대대손손 피로 적신 길 걷게 하리라

우리 결실 물려 주리라

하늘이 내린 이 목숨 헛되이 쓰지 않으리

그들은 무르고 맑은 마음이 싫다고 했네

눈물로 안 되면 피를 내어라

펜보다는 총칼이 강하다는 것

잃지 않는 긍지로 숨이 멎을 때까지

인생이여 만세



1) 18세기, 카스트라토를 위한 거세 시술 과정 및 치료(거세 후 아편물에 목욕하여 마취)는 영화 <파리넬리>의 장면을 참고하였다.
2) 제목인 ‘앵그리 인치(Angry inch)’는 90년대 mtf 트랜스젠더 락가수의 불행한 일생을 담은 뮤지컬 헤드윅의 주인공 밴드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유년기 원치 않게 받은 불법 트랜지션 수술이 실패하며 흔적만 남은 성기 일부 1인치를 일컫는다.

별조각용사단 글합작 참여한 초단편이고 주제는 바다, 임종, 찬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오덕후 > 글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개병에 걸린 사나이  (0) 2026.03.15
36.5  (0) 2021.06.15
[쉬몬] 네번째 규칙  (0) 2021.05.24
흉과 흠  (0) 2021.04.06
청운  (0) 2020.09.03

관련글 더보기